잔잔한 풍경처럼 흘러가는 일상이 있다. 그것은 특별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특별하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사소한 것들 속에서 빛나는 찰나를 포착해 낸다. 이 영화는 주인공 정원(한석규)과 다림(심은하)의 조용한 만남과 이별을 통해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의 무게를 담담히 그려낸다. 마치 한 편의 서정시처럼.
1.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정원의 사진관. 낡은 목재 문틀과 빛바랜 간판, 그리고 그의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영화의 주된 배경이다. 이곳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는 장소일 뿐 아니라, 정원이 남은 삶을 조용히 기록하는 공간이다. 여기에서 정원은 특별한 사건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손님들과 나누는 짧은 대화, 아버지의 병세를 살피는 순간들, 그리고 다림의 발랄한 등장. 영화는 정원의 이 평범하고 느린 삶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바로 ‘공기’다. 정원과 다림이 공유하는 순간들은 특별한 대사나 극적인 사건이 아닌, 그들 사이에 감도는 공기로 표현된다. 다림이 정원의 사진관에 처음 찾아와 주차 딱지 사진을 요청할 때, 둘 사이의 공기가 서서히 변화하는 것을 관객은 느낀다. 이것은 허진호 감독 특유의 섬세한 연출과 두 배우의 연기 덕분이다.
2. 사랑의 무게
정원은 다림에게 끌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기에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흔히 용기 있는 고백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원의 사랑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그는 다림을 향한 감정을 숨기며, 다만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를 기억 속에 담아두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다림 또한 정원에게 마음을 열어가지만, 그녀는 정원의 내면을 알지 못한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비극적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까워지지만, 완전한 연결은 이루지 못한다. 정원의 침묵은 다림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다림에게서 멀어지는 길이다. 관객은 이 사랑이 성취될 수 없음을 알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게 된다.
3. 사랑은 흔적을 남기고
정원의 병세는 영화 내내 직접적으로 강조되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그의 조용한 행동 속에서 죽음을 감지한다. 죽음은 정원의 삶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사진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사라질 자신을 준비한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그런 면에서 상징적이다. 사진은 순간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시도이며, 정원은 자신의 카메라로 세상을 기록하며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특히 마지막 장면, 다림이 사진관을 찾아왔을 때 정원의 빈자리를 느끼는 순간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정원의 부재는 슬프지만, 동시에 다림의 기억 속에 남은 그의 모습은 영원하다. 조용히 자신의 사진을 바라보다 뒤돌아서며 지은 다림의 옅은 미소는, 비록 추억으로 그쳤지만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한 애틋함이다. 죽음은 끝이지만, 기억은 지속된다. 영화는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남겨진 흔적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원의 사랑은 아무도 모르게 흩어지고, 그러나 어디에선가 여전히 숨 쉬고 있다. 그의 사랑은 다림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고, 그들의 만남은 잠시 스쳐가는 바람처럼 사라졌지만 흔적으로 남는다. 사랑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그렇기에 우리의 사랑이 언제가 추억으로 그친다고 해도 우리는 사랑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사라지는 순간들을 붙잡고 싶은 우리의 본능을 담아낸 영화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운은 길게 남아, 마치 그날의 바람과 햇살이 피부에 스미듯 관객의 마음에 머문다. 이미 여러 번 보았지만 이따금씩 다시 찾게 되는 영화가 있다. 내게는 <8월의 크리스마스>가 딱 그런 영화다.
섬세하고 잔잔한 감정선을 좋아하거나 삶과 사랑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좋아할 것이다. 극적인 전개나 빠른 템포보다는 느리지만 여운이 오래 남는 이야기를 선호하는 사람, 가볍게 소비되는 로맨스보다는 사랑의 본질과 이별의 의미를 진중하게 다룬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